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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박중철 교수의 친절한 죽음②] 추억글·박중철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 박중철 교수>

요즘 의대 졸업반인 본과 4학년들이 병원 실습을 나오고 있다. 이번 학기 실습을 마치고 나면 여름방학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의사고시를 준비하게 되고, 내년에는 학생이 아닌 의사로 병원을 뛰어다니게 될 것이다. 학생들에게 질병과 술기를 넘어 삶과 사람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 내 바람이다. 병 없이 사는 사람은 없기에, 엄밀히 병이란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주 수요일 2명의 학생을 데리고 나는 가정호스피스 방문을 나간다. 

이때 고정적으로 방문하는 환자 분이 있다. 진행성 위암 말기 환자인데, 복수가 많이 차서 매주 4L 정도 복수천자를 해야 한다. 여자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은퇴를 하시고 지내던 중 암이 발견됐는데, 말기라고 얘길 들었을 때 오히려 마음이 평온했다고 하셨다. 실제로 방문할 때도 늘 조용하고 차분하시다. 하루가 다르게 복수로 불러오는 배를 안고 한 주를 버티는 게 무척 힘드실 텐데도 늘 평온한 표정으로 나를 맞는다. 의사에게 이런저런 하소연을 한 보따리 쏟아낼 법도 한데 항상 말씀은 간결하시고 중간중간 엷은 미소도 잊지 않으신다. 

선생님은 좁은 환자용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복수를 배액하는 동안 학생들을 지긋이 바라보신다. 학생들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질문도 하지 않으신다. 한번은 학생들을 보다가 문득 학교 재직시절을 떠올리시는 듯 골몰히 천정을 보다 혼잣말처럼 내게 말을 건네셨다. 

“교복을 단정히 입은 학생들은 참 예뻐. 천사 같아. 그런데도 그런 예쁜 아이들이 속을 썩일 때는 참 골치 아파.”

그게 다다. 더 이상 말씀이 없으시다. 내가 어떤 학생이 그리 골치를 썩였느냐 졸라야 다시 입을 여신다. 
 
“수업을 안 들어오는 아이를 잡으러 다녔어. 엄마가 어렸을 때 할머니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떠난 거야. 수업을 안 들어왔어. 그래서 내가 다닐만한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잡아 왔지. 그러면 다시 또 도망을 갔어. 3년을.”

잠시 나도 학창시절을 떠올리다 짚이는 게 있어 물었다.

“출석 일수 때문에 그러신 거죠? 어떻게든 졸업을 시킬려고...”

선생님은 누운 자세에서 천천히 팔을 들어 총을 쏘듯 나를 가리켰다. 정답이라는 뜻이다. 

“졸업을 시켰지. 그런데 7년이 지나서 꽃을 들고 나를 찾아왔어. 엄마와 연락이 돼서 미국으로 간다고.”

그리고 다시 말이 없으시다. 궁금해서 재촉을 했다. 

“그래서 미국으로 간 거예요. 미국 가서 연락이 왔나요?”

“모르지. 정말 갔는지는... 몰라.”

“선생님. 그게 언제 얘긴 거예요?”

“50년 전.”

복수가 ‘쪼르르르’ 빠져나오는 것을 지루한 듯 보고 있는 학생들을 다시 지긋이 바라보신다. 그리고선 고개를 돌려 천정을 보다가 오른팔을 들어 허공에 글씨를 쓰듯 천천히 흔드신다. 이름을 적는 걸까. 엷은 미소가 번지신다. 이제 그만 멈춰야 하는 미래라는 공간에 선생님은 과거의 추억을 살포시 꺼내서 현재의 행복으로 메우고 계셨다.

헬스프레스  prmc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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